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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부여

지구를 위한 초록빛 희망의 한걸음을 시작한 케냐의 환경운동가 왕가리 마타이는 누구일까요?

최근 세계 곳곳에서는 이상 기후가 발생하는 빈도가 점차 늘어나고 매일 나오는 뉴스로는 미세먼지에 대한 건강위협까지 체감하며 지구의 생태계가 무너져 가고 있음을 점차 피부로 느끼게 되었어요. 환경보호의 중요성은 머리로는 아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실천하고 사람들에게 독려하는 행동은 결코 쉽지 않음을 새삼 느낍니다.

사실 가장 유명한 환경운동가는 살아남은 환경 운동가라는 말도 있지요. 환경운동가들은 실제로 주변의 많은 위협과 반대에 직면하게 됩니다. 산업화를 통한 경제 성장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의 경우 더욱 이러한 위협이 많을 텐데요. 척박한 환경에서도 그린벨트 운동을 통해 지구를 위한 초록빛 희망과 꿈을 실현한 왕가리 마타이를 소개합니다.

 

왕가리 무타 마타이 Wangari Muta Maathai @위키백과


왕가리 무타 마타이 (Wangarĩ Muta Maathai/1940년 4월 1일 ~ 2011년 9월 25일)


'마마미티' 케냐어로 나무들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200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케냐의 환경운동가 왕가리 마타이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한데요. 그녀의 일생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내게 무엇이 당신을 나아가게 하나요? 라고 물었을 때 나는 희망이라고 말한다.
People ask me, what keeps you going? I say, it's the silver lining."

 

1. 총명함을 인정받고 미국유학을 떠나다

 

왕가리 마타이가 태어났을 때 케냐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척박한 케냐의 환경과 더불어 식민지배로 인해 케냐인들의 누릴 수 있는 생활수준은 매우 낮았는데요.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총명했던 마타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고 영특한 마타이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 영어를 마스터하는 등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며 열심히 공부했어요.

영국의 식민지배가 끝나가며 케냐에서는 새로운 교육에 대한 열망으로 케냐 내에 있던 300여명의 장학생들을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게 지원했어요. 마타이도 그 혜택을 받아 미국과 독일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돌아왔어요.


2. 케냐로 돌아와 나무심기 운동에 헌신하며 아프리카의 발전에 평생을 바치다

대학 공부를 마치고 케냐로 돌아온 마타이는 나이로비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로서의 삶을 시작했어요. 그와 동시에 케냐의 환경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1977년부터는 '나무 심기 운동'을 리드했습니다. 당시의 케냐의 농가는 커피와 차 밭을 만들기 위해 나무들을 대부분 벌목했었고, 벌목으로 인해 나무들이 없어져 비 올 때 수분을 머금고 있지 못했고 이로 인해 나무에서 수분이 날아가 구름이 되고 다시 비가 내려주는 순환작용을 할 수 없어 비가 내리지 않으니 마을은 마실물조차 모자란 상황이었거든요.

 


이런 악 순환을 끊을 수 있는 것은 '나무심기' 임을 알고 있던 마타이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서 나무를 심어나갔고 이 운동을 점차 케냐로 확장하며 나무 심기 운동을 케냐 전역에 전개해 나갔어요.

이런 마타이에게 케냐 정부와 기득권층이 호의적인 것 만은 아니었어요. 뿌리 깊은 부족주의와 정치권의 부패와 토지횡령을 하나하나 밝혀 나가며 자연을 지키고자 했어요. 특히나 카우라숲이 부패한 정권 실세의 사택과 건물로 사용되려 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해당 지역에 사절단을 파견하고 나무 심기 평화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때 수많은 용역 깡패들에게 무분별한 폭행을 당하며 머리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UN에서는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성명을 발표하며 케냐정부의 책임을 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는 사과가 아닌 카우라숲이 나이로비의 발전을 위해 개발되어야 한다라는 입장을 유지했고, 개발을 위해 국민을 폭행한 정부에 분개한 케냐 대학생들은 시위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국민의 분노와 함께 케냐는 1999년 숲에 대한 개발을 멈추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3.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다

마타이는 환경에 이어 아프리카 대륙의 빈곤과 여성인권, 자리잡지 못한 민주주의 대한 구조적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 했고 그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대학교육을 마치고 교수가 된 그녀는 나이로비에서 인정받는 직업인 교수로써 안정적인 삶을 누리며 편안한 일생을 보낼 수 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케냐 내의 교육부재, 독재정권에 대한 문제, 낮은 여성 인권에 대해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투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녀는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고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받기도 하며 그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여정을 보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념을 잃지 않고 케냐의 변화를 위해 앞장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