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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부여

동기부여 시리즈 세번째, 음악가 클라라 슈만을 아시나요?

바흐, 헨델, 모차르트 등 음악 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천재 작곡가들 사이에서 여성의 얼굴이 떠오르시나요? 현대에 이르러서는 예술대학교나 예체능에 종사하는 직업군에 여성분들의 비율이 더 많은 것과 달리, 역사적으로는 많이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은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천재 여성 작곡가인 클라라슈만의 일생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1. 음악가 클라라 슈만은?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은 19세기 독일의 훌륭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서 역사에 기록된 여성 중 하나로써, 피아니스트이자 선생님, 그리고 작곡가로서 천재성을 발휘했습니다.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 독일 100마르크 화폐에 담겨있던 인물이 바로 클라라 슈만인데요. 클라라는 프리드리히 비크 교수와 성악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 어린 나이인 5살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공부를 시작하면서 9살 때는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에서 데뷔를 하고 11살 때는 이미 유럽 순회공연을 다니며 그 천재성과 스타성을 인정받았습니다.

당시 괴테는 클라라의 연주를 듣고 "남자아이 여섯명이 치는 것 같은 힘 있는 연주였다"라고 극찬을 하기도 했습니다.



2. 클라라 슈만의 활약

클라라와 로베르트

클라라 슈만이라는 이름은 그녀의 남편인 로베르트 슈만과 결혼하면서 바뀌게 된 이름인데요. 로베르트 슈만 역시 작곡가로서 그녀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교수 아래서 공부를 하던 학생이었고, 9살의 나이차이와 아버지 비크의 반대를 극복하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11살 때 부터 천재성을 인정받고 말 그대로 날아다녔던 클라라와는 달리 로베르트 슈만은 당시 유명세가 없는 무명 작곡가나 다름이 없었는데요. 결혼 후 남편인 로베르트 슈만이 작곡한 곡을 스타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가 연주하면서 알려나가기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암보를 해서 연주하는 연주가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는데, 클라라가 그 암보 연주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시초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암보연주: 暗譜 피아노 독주자가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하는 방식



3. 결혼과 임신 그리고 암흑기, 다시 천재 음악가로

부부는 슈만 집안의 정신병력에 대한 걱정과 딸의 천재성이 발휘되지 못할 환경을 걱정한 아버지의 반대를 뚫고 법원에 소송까지 제기하면서 사랑을 쟁취해서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부부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 했는데요. 남편인 슈만이 갑작스러운 정신병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무력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이후 남편은 자살시도까지 하면서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 당시 클라라는 막내를 임신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후 몇 년 뒤 남편 슈만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Johannes Brahms


남편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슈만의 제자이자, 클라라의 친구였던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을 위해 가사일, 출판일, 육아 등을 도와주었는데요. 클라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3개의 로망스>를 작곡하여 생일선물로 주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강한 음악가였던 클라라는 7명의 아이를 돌보며 연주활동을 지속해 나갔는데요. 평생 1,300번이 넘는 연주회를 가졌고 나이 70이 넘어서도 활발하게 연주 활동을 했습니다.



4. 클라라 슈만의 사후

1896년 5월 클라라 슈만은 향년 76세의 나이로 남편 슈만의 로망스를 연주를 들으며 사망했습니다.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건 아름다운 재능이에요. 슬플 때 이보다 더 큰 위로는 없죠 다른 사람에게 행복한 시간을 선사할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에요"



클라라는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스타로써 평생을 살았습니다. 작곡가의 의도를 그대로 전달하는 연주 스타일을 고수하며 음악을 듣는 관객들에게 클래식의 정수를 전달하기도 했는데요.

인생의 많은 고비와 고난 속에서도 음악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그녀의 이야기와 작품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